[20230216]안양 출신의


극작가·언론인 이서구(1899~1981)
이서구는 극작가, 연극배우, 영화제작자, 언론인으로서의 다양한 활동과 공로로 3개의 정부훈장을 받았다.

이서구(李瑞求. 1899.5.4∼1981.5.25)는 1899년 4월 5일(양력) 후릉참복의 이관규(李冠珪)와 그의 어머니 조성녀 사이에서 태어났다.

(趙姓女). “서울”에서 태어났다는 기록이 있고 “안양”이라는 기록도 있다.

그러나 동아일보 기자가 되기 위해 서울에 왔다는 기록이나 별장으로 돌아온다는 묵시적 표현으로 미루어 보아 안양에서 태어나 주로 서울에서 활동한 것으로 보인다.

성은 한산, 호는 고범이었다.

이후 그는 관악산인(冠岳山人), 화산학인(花山學人), 리고범(李孤帆) 등의 가명을 사용했다.

그는 사적이다 훈도학교, 서울교동공립사범학교, 제일고등사범학교(경기중) 2학년(자퇴), 오성학교(편입), 정척영어학교(졸업)를 다녔다.

22세(1920)에 동아일보 사회부 기자로 사회에 첫 발을 내딛고 신문기자로서 1921년 도쿄 특파원 조선일보와 매일신문 사회부장을 거쳐 많은 일화를 남겼다.

1926년.
하지만 이후 동양흥업사 연극부장, 시에른레코드 문학부 부국장, 경성방송국(JODK) 예능국장 등을 거치며 연예계에 입문했다.

특히 동경 조선일보 특파원으로 니혼대학교에서 미술을 공부하고 25년째(1923)에는 박승희 등 동경 유학자들과 함께 새로운 극단 토월회를 결성하였다.

그리고 김기진과 함께 대한민국 새 드라마 운동의 선구자가 되었다.

1930년대 초 본격적으로 연극계에서 활동하던 그는 1930년 동양극장 전무이사로 소개되어 60여편의 희곡을 썼다.

그리고 . 그는 1931년 설립된 연극시장에서 좌익 작가이자 연출가로 활동하다 이후 새 무대로 이적해 새 무대의 공연을 연출하는 핵심 인물이 됐다.

이후 민속극의 중심지가 된 동양극장 문예부원으로 활동했으며, 1940년 12월 22일 창립된 조선연극협회 회장에 선출되었다.

그는 1930년대 대중극의 흐름에 큰 영향을 미친 연극인 중 한 명이었다.

주로 작품을 쓰는 시나리오 작가의 역할을 맡았지만, 가끔 극단의 연출과 작품의 연출을 맡기도 했다.

또한 그는 연극뿐만 아니라 무용과 방송 대본을 집필하고 연극계의 정세와 배우에 대한 인물론에 대한 평론을 펴냈다.

그는 심지어 대중가요의 소설, 이야기 또는 가사를 썼습니다.

이후 34세에 동양영화사 매니저, 37세에 시에론 피코드컴퍼니 문학부장, 40세에 경성방송국(JODK) 예능국장, 45세에 동양극장 전문가로 일했다.

이후 조선연극문화협회 초대회장을 맡아 19세기 전반 한국 연극계를 지탱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해방 후 1945년 대한극작가협회 이사장, 이듬해(1946년) 한국극작가협회 이사장, 문학신보주간 이사장, 연극예술연구소 이사장을 역임했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전 홍보전대책위원회 사무총장, 이듬해 전쟁극작가 위원장을 역임하는 등 국난 극복과 국군의 사기 진작에 헌신했다.

그리고 54세에 국방부의 Victory Daily Week. 또한 7사단의 평양 탈환 작전에 참전했으며, 평양 입성 직후 평양 문총(平壤文總)을 창설하여 평양의 문화예술인 권익 증진에 앞장섰다.

이 공로로 화랑무공훈장을 받았다.

1951년 피난처인 부산에서 부인과 함께 입교한 뒤 대한방송협회 이사, 천주교작가협회 초대회장, 천주교기자회 초대회장을 역임했다.

한국전쟁 이후 방송계에서 활동하며 61세에 한국방송극작가협회 회장, 63세에 역임한 한국무대아카데미 최고위원, 한국방송문화회장을 역임했다.

협회.
1950년대부터 그는 라디오 극장으로 전향하여 다음과 같은 수많은 라디오 연극을 썼습니다.

, 그리고 1960년대에 TV 방송국이 심각해지면서 그는 주로 TV 연속극을 선보였습니다.

그의 작품에는 관객의 비극적 감정에 호소하는 신파 연극이 많이 포함되어 있으며 특히 사극에 능했다.

텔레비전 드라마의 경우에도 다음과 같은 많은 사극을 썼다.

그리고 조선 시대의 역사적 사건을 극화했습니다.

선생은 동양극장 시절 임선규(林仙圭)와 함께 뉴웨이브 드라마를 국내 대중극화에 일조한 인기 극작가로 꼽힌다.

선생님이 작사하신 인기곡 가사 포함 . 1930년대 후반 김영춘이 불러 대히트를 기록한 이 노래는 일제강점기, 한국의 수난의 시기에 몸부림치는 이들의 마음을 달래준 대표적인 가요이자 언제부턴가 불려지는 명곡이다.

오늘 모든 행사.
이서구의 대표작으로는 어머니의 힘, 부여회상, 익모초, 사랑에 속았다, 돈에 울다, 홍도야 우지마라 등이 있다.

≪장희빈≫, ≪강화도령≫, ≪민며느리≫ 등 50여 편 정도 있다.

서울문화상, 정보통신부 방송문화상, 1953년 화랑금성훈장, 1960년 방송문화상, 1964년 서울문화대상, 국민훈장 동백훈장 등을 수상했다.

1970년 공로, 1977년 문화공로.
향년 83세로 서울 역촌동 산25-6번지에서 노환하여 경기도 시흥시 소래면 선산산에 묻혔다.

1995년 이석을 기리는 비석이 세워졌다.

비문 앞면에는 ‘孤帆李瑞求先生追慕碑’라는 제목과 가요 ‘홍도야 우지마라’ 1~2절이 새겨져 있다.

비석도 이때 다시 세웠는데 이규태가 비문을 작성하고 이상태가 글을 썼다.

(출처: 시흥문 회원)
그러나 그는 사후 친일·반민족운동가로 지목됐다.

2008년에는 국정연구원에서 발표한 친일인명사전(연극/영화 58명)에 포함되었다.

이서구는 1940년대 이후 목단서구(牧山瑞九)로 이름을 바꿨을 뿐만 아니라 각종 친일단체에서 요직을 맡아 친일극적 행보를 보였다.

1940년 12월 조선극작가회 회원으로 활동하던 중 조선연예협회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12월 22일 조선총독부 경무처 산하 조선연극협회 회장으로 부임하면서 본격적으로 일본과의 협력을 시작했다.

1941년 1월에는 국력조선연합회 문화부 문화위원회 위원을 지냈고, 2월에는 부여신사 문화인문초등부 위원을 역임하며 청와대 원탁토론회에 참석했다.

‘반도체문화탐방축제’는 지난 3월 부여신사 노역봉사 소감으로 ‘사람 값으로 기쁨'(‘새시대’, 1941년 3월)이라는 글을 기고했다.

그리고 4월에는 ‘8개 그룹 지도자들의 새로운 문화 조직 운동’ 토론회에 참여했다.

5월에는 ‘내선일체’를 소재로 한 무용극 「부여회상곡」의 각본을 썼다.

9월에는 조선연극협회 직할극단 이동극단의 공연대본 「마더추」를 집필했고, 이동극장 중앙운영위원회 위원과 조선연극예술부 연락위원으로 위촉됐다.

국민조선중앙회 문화부.
1942년 1월 그는 “2. 국민체육의 해’라는 제목으로 필승 정권하 연극인 해체 논의의 장을 마련하고 연극인의 적극적인 전시 협조를 당부했다.

1943년 6월 조선문인보국회 소설연극과 고문으로 부임하였고, 7월 조선군 언론과 언론실습에 참석한 후 『보도실습』이라는 소감을 『취재실습』에 기고하였다.

조광』. 1944년 7월 한국문학협회 연극문학부 사무총장을 지냈고, 12월에는 한국연극문화협회가 주최한 모바일극예술공모전에서 일본 희곡 ‘봄의 역사’를 집필했다.

1945년 8월 3일 한국문학인문학회 연극문학부 회장에 취임
그는 전시 협력과 영화 및 연극 인력의 참여를 강조하고 제국에 대한 신민의 의무를 표현하면서 전쟁 중 일본이 도입한 문화 통제 정책을 옹호하고 전파하기 위해 다수의 영화 및 연극 평론에 기고했습니다.

대표적인 저서로는 “새 정권과 조선연극조합의 결성”(“삼천리”, 1941.3), “국극의 미래”(“매일신보”, 1941.10. 동아식 공연이 있다”(『 매일신보」, 1941.12.26), 「한국연극의 현상」(『민속문학』, 1944/5).
이서구의 대표작으로는 어머니의 힘, 부여회상, 익모초, 사랑에 속았다, 돈에 울다, 홍도야 우지마라 등이 있다.

≪장희빈≫, ≪강화도령≫, ≪민며느리≫ 등 50여 편 정도 있다.

1953년 화랑금성훈장, 1960년 방송문화상, 1964년 서울문화상, 1970년 국민훈장 동백장, 1977년 문화훈장을 받았다.

방송인 이서구(티스토리 이장춘/2012.05.19)
언론사 조선동아 대해부 ‘조선일보국민’ 친일기록(2)
조선일보: 부록(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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